셋째, 변화된 삶의 경계는 어디까지 언제까지 이어져야 할까요.
이러한 종말적 삶의 방식은 어느 정도 손해와 양보를 동반합니다. 따라서 어디까지 언제까지 참거나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가라는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인간의 타락이후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로 형제간에 시기와 다툼이 일고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이는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있냐’는 질문에 가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냐’고 따집니다. 가인처럼 책임에 경계를 긋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의 일차적 본성입니다.
이러한 불만을 예견이라도 한 듯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 어느 율법사가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께 질문합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냐는 그의 질문에 예수님은 답을 주지 않으시고 무엇이라 기록되었냐고 반문하시죠. 그거야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기록되었다고 그는 자신있게 답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잘 아는구나 그럼 가서 그렇게 행해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하시죠. 자신을 돋보이고 싶었는지 율법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우리가 잘 아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 물으시고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자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다시 ‘가서 이와같이 하라’고 하시죠.
율법사의 질문을 보면 그의 관심사는 영생 즉 영원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영생의 비결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그저 네가 아는대로 ‘그와 같이 행하라‘입니다. 이는 영원의 시점이 아닌 지금 이곳 여기에서 네가 얼굴을 맞대어 살고 있는 이웃을 따뜻하게 섬기는 것이 영생의 비결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영원이 아니라 지금, 천국이 아니라 이곳이라는 거죠. 지금 내 가까이에서 신음하는 이웃에게서 멀리 있는 이념과 구호 속의 인류로 눈을 돌리는 것은 거룩함이 아니라 책임의 회피입니다.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은 섬겨야 할 대상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하는 질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면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누구를 섬겨야 할까요라는 질문 속에는 누구까지 섬기는 것이 우리가 할 최소한의 책임인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섬겨야할 대상의 공간적 경계를 긋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그 경계를 그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서 행하라 다시말해 즉시성과 구체성을 지닌 태도를 보이라고 답해주십니다.
어디까지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봤으니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지도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1장 6절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질문은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됨이 언제냐'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때와 시기는 너희의 알바가 아니고 성령이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라'는 당부입니다. 언제까지 기약 없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질문자의 관심과 의도는 무시하시며 '가서 증인이 되라'는 섬김의 태도와 자세를 말하십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울타리를 치고 거기까지만 섬기고 거기까지만 견디려고 합니다. 그 이후의 일은 우리가 알바 아니고 혹시 그 이상 견디라면 어쩌면 파업과 농성이라도 할 태세 입니다. 경계를 긋고자 함은 인간의 죄성에서 발아한 이기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삶의 자세, 섬김의 태도 이외에는 관심이 없으신 듯 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영원이나 종말이 아닌 지금 우리의 주변으로 돌려 놓으십니다. 우리가 경계를 긋고 시선을 의도적으로 지금 여기(here & now)에서 그때 그곳(there & then)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천국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경건의 모습을 띈 자기 기만에 불과합니다. 어디까지 언제까지에 대한 답은 지금 여기에서의 태도와 자세로 귀착됩니다. 다시말해 경계나 한계가 없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넷째, 그럼 변화된 삶의 목표는 어디일까요.
앞에서 언급한 누가복음 10장 25절은 마태복음 19장 16절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이 주께로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냐'고 질문합니다. 톰 라이트는 그의 책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1세기 유대인에게 영생이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천국이 아니고, 그의 질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그때에 그 시대에 맞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겁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그가 지켜온 계명에 한 두 계명을 덧붙여서 도덕적 수준을 조금 높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라는 권면이라고 톰 라이트는 해석합니다. 그는 또 이 질문 속에서 우리는 신앙 고백과 최종 구원 사이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하고 그것은 바로 '성품의 변화'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지질학은 시간과 압력에 관한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단층이 단지 시간만 흐른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외부 압력이 무작정 가해진다고 무조건 생기는 게 아니듯이 사람의 고매한 인품도 생물학적인 연령이 증가한다고 또는 고통과 연단의 경험이 많다고 형성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필요한 시간과 적절한 압력이 절묘하게 조화되고 신적 개입에 의한 보이지 않는 손의 간섭이 있어야만 아름다운 단층도 고매한 인품도 형성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손길로 맺어진 성품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하나 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Chritocentric)의 삶을 살아가는 제자라면 필연적으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게(Christomophic)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 성령의 열매가 내면에서 영글어가는 내면적 변화, 즉 성품의 변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타고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이는 예배를 통해서도, 넓은 의미의 선교를 통해서도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것을 통해서도 이룰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좀 더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포함한다.’
맞습니다. 기독교는 참된 인간이 되는 것 입니다. (Christianity is True Hum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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