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3). 종말은 이미인가 아직인가?
종말이 언제 임할까요. 종말의 시기에 대해 크게 세 관점이 있습니다. 먼저 종말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어서 이 땅의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은 종말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를 미래적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종말은 이미 왔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염려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완성된 종말론이라는 관점도 있습니다. 셋째로 종말은 예수님의 초림때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으로 이미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통치하시고 훗날 재림으로 완성된다는 개시된 종말론의 관점이 있습니다. 건강한 신학은 세번째 관점을 지지합니다. 흔히 이미 왔지만 아직은 아님(alreadty but not yet)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놓치면 반드시 종말이 임한다는 사실도 놓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초림때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고 선포하셨고 산상수훈으로 그 나라의 헌법에 해당하는 통치 원리를 알려주셨으며 친히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마치 상해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대한민국은 시작되었고 해방으로 독립이 완성된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미 시작된 종말은 반드시 완성됩니다. 영화 「암살」에서 염석진이 왜 우리를 배신했냐는 옛 부하의 추궁에 ‘일본이 그렇게 쉽게 망할 줄 몰랐으니까’라고 답합니다. 이는 반민특위 재판에서 미당 서정주의 진술을 인용한 것으로 대다수 반민족 친일분자들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반드시 독립은 이뤄진다고 믿었더라면 반민족 행위는 많이 줄었을 겁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이 땅에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의 삶의 방식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랭던 길키의 자전적 스토리인 『산둥수용소』(새물결플러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의 책 『오늘을 그날처럼』에 소개했던 내용을 다시 인용해 봅니다.
저자는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1940년 북경의 연경대학 영어 교사로 봉사하다 1943년 일본의 ‘중국 내 외국인 격리 정책’에 의해 산둥수용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산둥수용소는 생명의 위협은 없지만 상당한 압박이 가해지는 곳이었습니다. 선교사 사업가 등 다양한 직업의 서구인 1500여 명이 좁고 열악한 거처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들은 보건과 의료, 공중 위생, 식사 및 숙소 문제 등의 난관을 헤쳐가면서 기본적인 필요성들을 해결합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인간은 적절한 기술로 얼마든지 낙원을 이룰 수 있다는 낙관론에서 점차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며 비관론을 거쳐, 전적 타락의 개혁주의 교리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수용소에는 정확히 1450명이 있었고 그 중 200명이 미국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적십자사는 각종 생필품이 가득한 1550개 꾸러미를 보내옵니다. 일본군 지휘관은 각 사람당 한 꾸러미씩 나눠주고, 남는 꾸러미 100개는 미국인에게 주기로 결정합니다. 이 결정에 수용소는 기쁨과 호의가 가득한 분위기로 변합니다. 그러나 미국 재산이니 미국인이 일인당 7개 반씩 모두 가져야 한다고 미국인들이 주장하자 분위기는 실망과 적대감으로 급변합니다. 길키는 미국 대표단을 찾아가 골고루 나눠 갖자고 설득하지만 변호사는 법률적 지식으로, 선교사는 교묘한 신학적 지식으로 자신들의 욕심을 포장합니다. 결국 미국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일인당 한 꾸러미씩 받고 남은 100개는 다른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저자는 미국인들의 탐욕적인 반응이 본능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동물적인 탐욕이 아니라 인간적, 사회적 반응이라는 겁니다. 언제 수용소 생활이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꾸러미는 긴 수명을 보장하는 안전장치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남을 해롭게 할 수 있지요.
꾸러미는 시간적으로는 수명의 연장을 보장할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는 상위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입니다. 영화 설국열차가 주장하듯이 소유는 계급을 형성하고, 그 사회가 존속하는 한, 높은 계급은 긴 수명을 보장합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꾸러미에 대한 집착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더 안전하게, 더 오래 살고 싶다는 열망이지요. 그러나 수용소의 결말이 어떠한지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입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수용소 사람들도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았더라면 이런 결정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의 삶을 수용소에 비유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 땅에서의 전쟁은 영원히 지속되고 수용소 생활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땅에서 꾸러미를 한 개라도 더 가지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며 사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워 합니다. 왜냐하면 조만간 전쟁이 끝나고 이기적인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 크게 후회하며 민망해 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통해서 종말은 반드시 임할 것이고 종말 이후의 삶도 이어질 것임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은 어떠해야 할까요? 수용소 생활이 끝나면 전혀 다른 생활이 기다립니다. 전쟁 중의 수용소와 전쟁이 끝나 자유로운 상황은 서로 연속되지 않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어제는 목숨처럼 지키려 했던 꾸러미가 오늘은 쓰레기로 변합니다. 그러나 앞 상황에서 행동했던 기억은 뒷 상황으로도 연속됩니다. 이 삶과 이후의 삶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하지요. 이생이 다한 뒤에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별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땅의 기억이 그곳에서도 영원히 지속된다는 걸 믿는다면 우리는 후회할 거리를 쌓지 말고 그날의 기쁨의 소재를 심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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