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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신학

일과 신앙이 하나되는 생활 12 - III. 어떤 생각이 사람의 행동 양식을 결정할까?(2.종말론적 삶의 방식)

by kainos 2020. 9. 6.

2. 종말론적 삶의 방식

이러한 사고 방식의 변화는 필히 내면의 변화로 이어지는데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어떻게 지속되어야 하며,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 한번 알아봅시다.

 

첫째, 변화의 시작은 아무래도 관점의 변화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보기에 미래에 가장 좋을 것 같은 선택을 합니다. 시공간의 좌표축에서 지금 여기라는 지점에서 미래의 특정 시점 특정 장소에 좋은 모습으로 도달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길을 선택하죠. 즉 지금 여기가 중심이되고 미래의 그곳을 내다보는 관점이 일반적이죠.

그러나 관점을 역으로 바꿔 봅시다. 먼저 내가 꿈꾸며 기대하는 미래의 어느 가장 이상적인 시점과 장소를 그려봅니다. 그 지점으로 옮겨가서 그쪽의 관점으로 오늘 여기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장 타당할지를 생각해보는 겁니다. 다시 말해 미래적 시점과 그곳의 관점으로 지금 이곳을 바라본다는 거죠. 물론 미래의 특정 지점을 그려보는 것은 사람 마다의 미래관에 따라 달라집니다. 신앙이 알려주는 미래, 즉 종말적 미래에서 볼 때 가장 후회하지 않을 가장 보람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종말적 관점으로 오늘을 바라보기입니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 시간 여행을 하는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땅을 떠나면서 아들에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법을 알려줍니다. 그 비법이란 하루를 두 번 사는 겁니다. 만약 첫 번 째 하루를 잘못 살았다면 다시한번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후회스런 부분을 고치고 바로잡으라고 당부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렇게 살아냅니다. 그리고 빡빡한 하루 속에서도 여유와 관용의 틈새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주인공은 굳이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다시 돌아온 두 번 째의 그날처럼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낸다면 후회의 여지가 없어지고 너그럽고 여유있게 살아낼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시간여행은 상상속의 이야기죠. 누가 하루를 두 번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영화의 가장 큰 인사이트는 바로 미래적 관점으로 살아내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한 겁니다. 오늘을 고민 끝에 다시 돌아온 어느 시점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매일매일 후회의 빈도와 폭을 줄여나갈 수 있다는 거죠. ‘오늘을 그날처럼’ 살자는 겁니다.

 

둘째, 관점의 변화는 반응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미래적 관점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하다보면 일상속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에 대한 반응이 바뀔 겁니다. 바울 서신에는 자주 보이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전체 서신의 전반부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정체성이 변화되었음을 자세히 설명하고, 후반부에는 이에 합당한 성도의 삶에 대해 기술하고 제시합니다.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짓는 중요한 접속사는 '그러므로'입니다. 이 접속사 '그러므로'는 전반부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이유를 다시 기억하게 하고, 이어서 그 이유에 합당한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후반부 사이에서 분수령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를 경계로 전반부에는 십자가의 은혜를 바탕으로 한 '믿음', 새 창조를 갈망하는 '소망'이 근거로 제시되며 후반부에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드러나는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권면합니다. 이 삶의 방식 속에는 십자가 은혜와 새 창조에 합당한 종말적 윤리를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 '사랑'으로 녹여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적인 지침이 제시됩니다. 적절한 예가 로마서, 에베소서, 골로새서입니다. 로마서는 12:1에서는 '그러므로' 거룩한 산 제물과 같은 삶을 살라고 권하고, 에베소서는 4:1에서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하며, 골로새서는 3:1 '그러므로'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의 것을 찾으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서신의 논지는 결국 존재(Being)는 삶(Doing)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믿음과 삶은 하나여야 한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4:21~24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새번역으로 옮겨봅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본문에 새로운 이라는 단어가 눈길을 끕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새롭게 되었으니 새 사람답게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살라는 권면입니다.

새 생명 새 사람 새 마음 새 피조물, 신약에서 '새로운'(Kainos)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저는 십자가를 연상합니다. 물론 이 단어는 계시록 21장 5절의 '만물이 새롭게 됨'이라는 종말적 소망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 출발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그가 죽으시고 나를 살리셨기에 우리가 새로워졌습니다. 생각할수록 가슴 벅차면서도 무겁고 민망한 형용사입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은 새로운 정체성의 인식 없이는 그 출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또한 새로운 정체성을 인식했다면 일상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마땅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지는 25~32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자세히 소개하며 이렇게 살기를 권면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말을 하며, 화를 참고 노여움을 품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떳떳하게 수고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나쁜 말 대신 덕을 세우고 은혜가 되는 말을 하며,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을 그치고 친절과 서로 불쌍히 여김과 서로 용서하라고 합니다. 거짓, 화, 도둑질, 나쁜 말, 악독 격정 등 옛 생활방식이 먼저 언급되고 이와 대비되는 새 생활 방식인 참된 말, 덕과 은혜의 말, 친절과 용서 등을 취하라는 거죠. 새로움의 근거인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여기서 빼버린다면 이 본문은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바뀌었고, 새 창조의 소망으로 관점도 바뀌었으니 이에 걸맞게 삶의 태도와 반응도 바뀌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