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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삶책(책과 문화)

그리스도인에게 성공이란 무엇인가(번역 요약)

by kainos 2020. 5. 4.

2015년 9월 7일 오후 2:43

- R. Paul. Stevens. “The Complete Book of Everyday Christianity” IVP 1997의   Success, Failure 부분을 번역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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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정의 

대부분의 사전이 정의하기를 성공이란 갈망하던 일을 성취하는 것(attaining a desired result)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공적인 건축계획이란 건물이 다 지어지는 것으로, 성공적인 건축가는 이 건축물을 완성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건축물과 건축가에서 다른 영역으로 일반화 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에게 성공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은 건축물같이 특정한 것의 성공에 관한 질문이 아니고 사람의 성공에 관한 질문이다.

여기서 사전적 정의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원하던 것을 이루었다 하여도 원하던 성공의 사람이 되었는지 여부는 단지 사전으로 가려낼 수 없다.  사전은 다만 지배적인 문화적 가치를 표현하려 할 따름이다. 전형적인 예로 컴퓨터 사전에 성공의 둘째 의미로 “ 부, 지위, 명예 등의 성취 ”로 정의한다.

서구문화에서 성공은 종종 부와 안전, 공적인 평판이나 악명, 권력과 영향력, 육체적 미모나 재능 등 의 가시적 성취로 판단되고 따라서 이런 것들을 갖지 못함을 실패로 간주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조차도 문화를 반영하여 사람이나 일을 이런 문화적 토양아래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성공과 실패의 관점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신구약 어디에도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와 정확히 일치하는 성공과 실패라는 단어는 없다. 성경의 언어로 가장 success와 근접하는 단어는 “blessed” 이다. 히브리어로 barak 헬라어로는 makarios 이다. 둘 다 성공, 번영, 행복, 부러울 정도로 풍족한 삶의 개념을 전달한다.

구약의 성공, 축복에서 key issue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서 사는 것과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다.(신11:26-28, 시1:1, 5:12) 

신약에서의 성공은 개인적인 변화(transformation)의 개념으로 묘사되고 있다. 팔복(The Beautitudes 마5:3-12)은 사람의 성취가 아닌 변화된 사람 자신이 축복의 열쇠임을 가리킨다. 성공의 정의를 빠르게 내리고 싶다면 팔복의 구절을 복 있는 사람(the blessed) 대신 성공적인 사람(successful)으로 대치시켜 읽어 보면 된다. 예수님이 내린 성공의 정의는 세상적인 부, 권력, 명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진정한 성공은 개인적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음으로 가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팔복에 따르면 성공이란 사람의 내면이 다음과 같은 것들로 충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연약함(vulnerability), 깨어짐(brokenness), 온유함(gentleness), 의를 열망함(craving for rightness), 동정심(compassion), 진정성(single-mindedness), 화목함(reconciliation)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기뻐함.

성공의 문화적 이해

서구문화에서 이런 성공의 관점은 두 가지 강한 변종을 갖는다.

첫째는 어리석은 성공비전( “crass” vision of success”)이다. 흔히 볼 수 있는 포스터에 많은 승용차, 보석, 주택, 돈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죽을 때 많은 장난감을 가진 자가 승자다” –He who dies with the most toys wins

이 포스터는 어리석은 성공비전을 꼭 찍어낸 재미가 있다. 이러한 성공 이해가 우리 주변에 있어서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생활에서 이러한 물건들은 덜 중요하다. 어리석은 성공비전으로는 사람이 원하던 인생의 결과를 성취했는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판단할 수 없다.

둘째 변종은 어리석은 성공비전의 과함을 회피한다. 이는 성공인생이란 물질적으로 안락하고 독립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목표를 얻게 되면 가치 있어 보이는 다른 목표를 얻기 용이해진다고 말한다. 이 비전은 상당히 매력있어 보인다. 자기 유지에 긴급한 필요를 자유롭게 채우고 안전한 삶을 살게 되면 어떤 특정한 성공목표를 발견해도 쉽게 도달 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민감한 구석이 있다. 이런 일반적인 성공비전이 아무리 매력적이긴 해도 수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의 역경극복과 안락성취에 의해서 성공이 이루어진다고 그리고 있다. 그리고 분명하게도 이것은 성공 여부의 근거가 근본적으로 경제적 평가이다. 결국 이것도 첫째 변종과 별 다르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을 원한다. 달리 말하면 인생의 목표들을 성취하기 원한다. 그러나 성공을 아무리 comfort-and-independence의 개념을 함축한다 해도 경제적 측면으로 묘사한다면 참된 성공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너무 제한적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공한 사람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 예수, 아시시의 프란시스, 키에르케고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들은 comfort-and-independence의 개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Comfort와 independence를 소유하지 못했지만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 중 일부는 comfort와 independence를 모두 포기함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당대에는 실패자로 간주되고 죽은 다음에야 분명한 성공을 이룬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들을 uncomfortable succeeders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성공이 단순한 comfort와 independence 이상으로 넓고 깊은 것이라는 것을 믿게 한다. 성공은 개인에게 내적으로 깊고도 개인의 범위를 벗어난 넓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여진다. 성공이 개인에게 무엇이건 간에 단순하지도 쉬운 것도 아니다.

   

성공과 성품

 스티븐 코비는 미국문학에서 지난 2세기 동안 성공에 관한 서로 다른 두 주제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지난 150년 동안 우세한 윤리로 그는 이를 성품 윤리(character ethics)라고 불렀다

이는 “성공적인 삶의 기본 원칙(effective living of basic principles)이 있으며 이러한 기본 원칙을 그들의 기본 성품에 잘 조화(integrate)시켜야 진정한 성공과 지속적인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성품윤리에는 fidelity(성실), patience(인내), industry(근면), simplicity(검소)의 덕목이 포함되며 이들은 어느 정도의 안락(comfort)과 독립성(independence)을 희생해야 얻어진다

그러나 최근 50년에 이르러 Covey가 성격윤리(personality ethic)라고 명한 성공비전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 비전에 의하면 “성공이란 대인관계를 매끄럽게 하는 개성(personality), 공적인 이미지, 태도와 행동, skill과 technique의 결과물이 되었다. ”

긍정적 사고, 기타 유행하는 방법들을 가르치는 학원들은 우리의 개성을 잘 다듬어 독특한 태도를 유지하여 경쟁에서 동료를 이기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바른 길이라고 조언한다.

성격윤리는 설사 지나간 두 세대 동안 지배적이긴 했지만 피상적이거나 온전하지 않다는 점을 Covey등이 발견했다. 이는 성공을 사람으로부터 성장된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사람에게 부가된 어떤 것으로(comfort나 independence처럼) 간주한다 것이다.

 반면 성품윤리의 관점에서 성공이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이룰 수 있는 최선을 점차로 펼침으로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성공이 비록 사람이 good person이 되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나,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성공이 단지 한 사람의 성격이 발전하고 달성되는 것에 의해 제한 되지는 않는다.  Uncomfortable succeeders는 아마도 고결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나 그 성품이 성공의 수단이지는 않고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이 취득한 것들과 무관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성공적(훌륭하게)으로 대하는 방식으로 성공적인 사람들이었다.

Uncomfortable succeeders는 성공을 당연한 권리로 취득하도록 자신을 재촉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하였고, 오히려 타인을 섬겨 다른 사람이 성공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점차 성공하였다.

Kierkeggard의 표현을 빌리면 성공은 간접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공을 원한다면 성공을 직접 찾으려 하지 말고 대신에 다른 사람을 성공하도록 돕는 등의 different goal을 얻으려 노력한다면 성공이 우리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성경적 성공비전

 성공에 대하여 상식적 이해를 가지고 성경에 접근한다면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success라는 단어를 원어 분석하여도 별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성경에 성공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고 번역자들에게 성공의 상식적 개념이 성경저자가 의도하고 하는 바와 잘 match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성경저자가 성공을 믿었다면, 그것이 comfort와 independence로 잘 포장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다른 목표를 찾도록 설득하였을 것이다. 성경저자는 우리를 평가할 때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목표를 성취하였는지를 가지고 평가할 것이다.  이렇게 성공의 개념이 뒤바뀐 좋은 예가 빌립보서에 잘 나와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5-11)

이 것은 성공에 이르는 놀랄만한 비전이다. 첫째 이것은 지향점이 지극히 원심적이다. 자신에게 집중하기보다 목표들이 서로 결합하도록 조정하여 가능한 강하게 밖으로 회전하게 하며 이기적인 성취를 지향하지 않고 이타적 이다.

둘째로 성공비전의 성취여부는 성공에 있지 않고 전적으로 다른 상태 즉 섬김(servant hood)에 있다. 섬기는 자는 아무런 comfort나 independence가 보장되지 않지만(빌 4:10-13) 역설적으로 이것이 성공의 길이다. 성공은 그 뒷자락을 잡을 수 없고 앞에서 껴안을 수는 있다. 만약 전심으로 성공하고 싶어한다면 이 열정이 우리를 실패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종이 되고자 한다면 성공이 당신 앞에서 기다리는 색다른 성공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모든 Uncomfortable succeeders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종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다. 이를 껴안음으로 그들에게 성공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함이 주어졌고 결과로 성공이 주어졌다.

예수님과 기타 Uncomfortable succeeders는 그들의 노력이 성공을 평가하는 기준으로는 파멸의 운명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공에 유념하지 않고 단지 종이 됨에 전념함으로 그들의 활동을 압도하고 놀라운 성공이 허락되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셨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성부께서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성공을 직접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성공은 교묘히 그들을 피해나간다. 그들이 단지 욕망과 곤경에 처할 뿐이다.

어리석은 성공비전 즉, ‘많은 장남감과 함께 죽은자가 승자이다 ’라는 생각은 더 나쁜 생각을 불러온다.

우리는 이 어리석은 성공비전 대신에 최고의 친구, 최고의 행실, 최고의 회심, 최고의 승리를 목표로 삼을 수 도 있다. 이것들은 덜 물질주의적으로 덜 미련하게 보인다. 성공을 직접적으로(directly) 추구하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추구하는 특별한 목표에 의해 평가될 것이나 이들 모두다 성경적 관점으로 보면 진정한 성공을 놓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꺼이 종의 길로 성공을 얻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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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character는 흔히 어떤 생활양식이나 생활태도가 성숙·고정된 성인이나 집단에 대해서 쓰이며, 또한 인간의 사고, 감정, 행동의 양식을 결정하는 도덕적인 면이 강조된 개념을 나타내고, personality는 사회적, 개인적 관계에서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정적인 면이 강조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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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성공과 가장 유사한 단어로는 구약의 바락, 신약의 마카리오스 일 것입니다.

- 그러나 지혜서에서 권면적 표현으로 많이 사용되는 이 '복'의 개념은 정오의 태양같은 신명기적 사고에서 출발하여, 석양의 황혼같은 전도서를 거쳐, 욥기에 이르러 칠흙같은 어두움에 이르면서 도치된 개념으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 여기에 신구약 중간기를 거쳐 다시 한번 부활 사상과 혼합되면서 또다시 반전(영원의 관점)되어 현세적, 신명기적 복의 개념은 흔적기관처럼 자취만 남게 되는 것 같습니다.

- 결국 성경적 성공비전은 예수께서 사신 '타인의 성공을 위한 희생적 삶'이 성공의 모델로 제시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타인의 성공을 통한 나의 영원의 관점에서의 성공).

- 그렇다고 해서 신명기 27.28장의 복과 저주의 근거가 되는 순종 불순종. 그리고 그것의 기준인 하나님 사랑, 나아가 지혜서에서의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 경외가 무효가 되었다 할 수 없듯이 현세적 물질적 축복이 모두 무효가 되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 다만 그것은 영원한 성공(복)을 향한 또 다른 발판으로 작용할 때 순기능적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 계시록에 흩어져 있는 지혜문학의 흔적으로 7개의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 속에 영원의 관점에서 성공적인 삶을 지향하라는 권면과 위로가 숨겨있는데

그 것은 결국 매일의 현실 삶속에서 말씀을 지켜고,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인격이라 할 수 있는 옷을 빨고 혼인 잔치에 참여하라는 지극히 현실적 권면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 계시록이 제시하는 복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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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Paul, Stevens. “The Complete Book of Everyday Christianity” IVP 1997의 Success, Failure 부분 일부와 저의 석사 논문 "요한계시록의 일곱 Macarism에 관한 연구"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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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관련된 서적을 소개합니다.

- 종말적 회복 사역과 관련해서 "새 하늘과 새 땅"(미들턴저, 새물결플러스)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 "예수 신경"(스캇 맥나이트저, 새물결플러스)

- 지혜문학적 표현과 관련해서 "지혜전승과 지혜문학"(천사무엘저, 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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