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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삶책(책과 문화)

고통과 씨름하다

by kainos 2020. 6. 20.

--  고통과 씨름하다.---
(토마스롱 지음. 장혜영 옮김. 새물결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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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름 해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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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 바닥에 전해오는 사각거리는 모래 바닥, 힘을 주고 버티기에는 바닥이 그닥 미덥지 않고 발을 움직여 체중을 옮기려 하니 요철이 걸치적 거립니다.

* 이미 수 많은 사람이 붙잡은 땀에 절은 샅바를 붙잡는 것도 즐거운 느낌은 아니지만, 약한 손으로 상대의 굵직한 다리와 힘을 주고 받는 일은 상대를 넘기기에도, 버티기에도 버거운 일 입니다.

* 내 옆구리를 파고 드는 땀 젖어 끈적한 상대의 팔목, 거친 숨소리와 가슴통의 움직임이 내 팔에 그대로 전해져 올 때의 불쾌하고 찝찝한 기분...
할 수 만 있다면 이 모래판을 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승부가 나기 전에는 모래판을 떠날 수도 없습니다.

* 초등학교 5학년 때 체구가 좀 된다고 씨름부에 불려갔다가 몇일 만에 진저리를 치며 도망쳐 나온 아픔이 있는 저로서는 씨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기운이 빠지고 풀 죽는 일 입니다.

* 씨름 판에 어쩔 수 없이 뛰어든 사람은 그 판이 온 세계입니다. 더 이상의 세계관도 더 이상의 신학적 질문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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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스본으로 부터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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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원인은 창세로 부터 이지만 전능하시고 선하시다고 믿어온 그 하나님께서 이 모래판으로 우리를 밀어넣고 즐기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은 1755년 11월1일 만성절 예배 시간에 임한 리스본 대지진으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서구 신학의 역사에서 리스본 지진은 하나의 큰 분수령, 씻을 수 없는 상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이 되어 신정론, 변신론이라는 신학적 큰 주제를 탄생시킵니다.

* '하나님은 존재하시냐?' '그렇다면 전능하시냐?' 또한 '선하시냐?' '그렇다면 우리에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방치하시느냐?' 라는 역설적 질문 들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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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그는 전능하지 못하셨다', 어떤 이는 '그는 선하지 않으신 하나님이다', 또 어떤 이는 '그러한 신은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소견대로 갈 길을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역사가 진행하면서 여전히 이러한 도전들은 - 자연 재앙과 재해, 악의 번창 그리고 의인의 고난,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들- 모양을 달리하고 또한 진화해가면서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더 위태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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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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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여 년 전, 막 시작한 신앙 생활에 닥친 신정론적 위기를 뒤 돌아 보면
토마스 롱이 '신정론은 논리적 문제 해답이 아니라 의미를 향한 순례에 가깝다'고 말한 것을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 사람들은 마치 욥의 세 친구들 처럼 이래 저래 많은 훈수들을 던져주었고 그걸 나침반 삼아 많이도 헤매었지만 지내고 보니 그닥 도움이 되지 못했고 많은 상처들만 남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 누군가 절규하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냐"고 좌절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그리고 그가 이러 저러한 인과론적 해석과 암기한 공식 같은 모법 답안의 소음이 괴롭다면,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듯이 과감히 그런 것들, 걷어차고 하나님의 존전에서 따지면서 항의의 기도를 드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으로(우리 성경에는 이를 '민망하다'고 번역했지만), 마치 하나님의 의자 앞 다리를 붙잡고 부르짖듯 했습니다.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면 이러시면 안됩니다. 회복의 손길을 펼치시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실 수 없습니다. 이제 행하시고 자비를 베푸셔야 합니다.'

* 온순하고 체념적인 기도는 그런 상황에 적절치 않았습니다. 항의의 기도. 그것은 자비와 은총과 정의에 대한 갈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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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보면 압니다(Solvitur Ambura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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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신정론이 격정적인 감정의 폭발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감정을 넘어 이성적인 신 인식을 원하십니다.

* 철학자 제논이 디오게네스에게 와서 궤변적 질문으로 도전하자 디오게네스는 "Solvitur Amburlando"라고 답하고 방안을 걷기 시작했다고해서 생긴 말로,
'걸으면 해결됩니다(It is solved by walking)'라는 뜻입니다. 이는 더 발전해서
'이론이 아닌 실제로 해보다 보면 해결됩니다(The problem is solved by a practical experiment).' 라는 뜻이 됩니다.

* 인생! 살아봐야 압니다. 아니 살아봐도 사실 잘 모릅니다.

다만 인생은 구호나 원리가 아니라 삶의 스토리 입니다. 공식만 가지고 훈수둘 수 없는게 인생입니다.

각자의 내러티브의 경우의 수는 무한에 가깝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단언적인 돌직구나 폼나는 명언이 그닥 멋있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건 그 때 한번 밖에 유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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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말은 우리에게 희망, 그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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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는 자에게 종말은 결코 두려움의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드시 임하여야 할 심판이고 회복이고 신원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비폭력성은 궁극적으로 그를 거부한 이들에게는 평화를 회복시키는 폭력으로 임해야 합니다.

* 종말의 회복적 정의를 갈망하며 우리는 부단히 심어야 합니다.
때론 눈물로, 때론 함께 해줌으로, 때론 탄식으로 심고 또 심는 것이 신앙입니다.
십자가는 종말에 임할 것이 바로 사랑이며 동시에 진노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표지로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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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신정론의 씨름판에서 고통과 씨름하는 젊은이에게 해 줄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어깨 한번, 손 한번 잡아 줌으로 진심을 전해 주고 싶고 온기를 나누고 싶은 것 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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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다시 교회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도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도 신정론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을 겁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시대의 신정론에 눈과 귀를 열어야 합니다.

* 그러나 그들은 신정론의 정답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신정론을 진지하고도 진지하게 가슴으로 함께 해 줄 "사람같은 사람"을 원하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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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정론!
그것은 답이 아니라 태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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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