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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신학

없음과 있음

by kainos 2020. 6. 28.

 

https://www.youtube.com/watch?v=ZBSiIAfeU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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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다섯 주인공을 소개하는 내용에 이런 대사가 있다. 채송화는 자기 일도 잘하고 남의 어려움도 잘 도와주면서 노는 것도 좋아하는 '단점이 없는' 사람으로, 김준완은 수술 실력은 최고인데 결정적으로 '싹수가 없는'사람으로, 석형은 '사회성이 전혀 없는'사람, 신부가 되기 원하는 안정원은 '욕심이 없는'사람, 천재 이익준은 나이트클럽에 살다시피 하지만 입학은 물론 졸업 수석에, 심지어 국시까지 수석으로 통과하는 재수 없는 녀석이지만 '열등감과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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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과 선입견이 없으면 스스로를 제한하는 왜곡이 없다.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샌드라 오의 인터뷰를 봤다. 여러 감동스런 지점이 있지만 기억에 가장 남는 대목은 이 열등감과 선입견에 관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인상적인 통역이었던 샤론 최가 '샌드라, 당신의 인터뷰 기사에서 이미 나 자신도 이 업계의 논리에 세뇌당해 스스로 어떤 제한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라고 하면서 요즘 벌어지고 있는 미투, 인종차별 등의 현상에 대해 질문한다. 이에 대해 샌드라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봉 감독이 오스카를 로컬이라고 했을 때, 와우 그 말이 계속 내 뇌리에 남았다.', 

'그가 오스카 상을 받았을 때 스스로 전혀 불리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아시안 남자가 우뚝 서 있는 것을 봤다. 인종차별적인 사회에서 자라지 않은, 결코 소수자였던 적이 없던 한 사람을 봤다.' 바로 그게 나에게 필요한 관점이었고 그는 내 눈을 뜨게 했다'  

그리고, 온갖 감탄의 몸짓으로 '그저 단지 유색인종인 한 아시안, 한 한국 남자인 그에겐 전혀 (자신을 제한하는) 어떤 layer가 없었다' 고 말하면서 '그는 그냥 자유인이었다. 그가 오스카를 로컬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너무나 세련된 공격이었다. 나에게는 그의 자유로운 시선이 없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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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장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고발을 받은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 앞에 서있다. 세상의 권력자들 앞에선 바울은 공손하지만 당당하다. 이 장면은 공회에 끌려와서도 할 말을 다하고 마는 스데반 집사나 본디오 빌라도 앞에선 예수님의 당당함과 비견된다. 

어떻게 이들은 세상의 권력자들 앞에서 그렇게도 당당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세상의 가시적인 영역을 넘어 비가시적 영역을 읽어내는 눈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벨릭스 총독처럼 세상 권력은 심판대 위에서 고갯짓으로 바울에게 진술을 명령하고, 빌라도처럼 예수님께 조롱 섞인 말투로 심문했지만, 피고인 바울과 스데반집사에게는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우주를 감싸고 있는 비가시적인 권세를 읽어내는 시선이 있었다.

샌드라의 표현대로 '(보잘것없는) 유색인종'인 변방의 한 영화감독이 전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 무대에 서서 '너희는 그래 봐야 로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함도 따지고 보면 열등감과 선입견으로 마이너리티 영역에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고 가두지 않은 자유로움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지역 선(local good)이 세계 선(global good)이 되려면 넘어야 하는 강이 있다. 바로 상식과 보편(common)의 강이다. 지역의 감각이나 이익은 공공선(common good)의 관점에서 상식(common sense)으로 조명해보면 그 허점이 보인다. 지역적으로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타당해 보이는 혐오와 배제의 논리가 상식의 강에서 세례를 받으면 그 폭력성의 추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선입견과 열등감 없는 자유로움이, 천재의 재수 없음이나 싸가지 없음으로 빠지지 않으려면 슬기로운 의사들이 그랬듯이 다정다감한 친절함으로 더 어둡고 그늘진 곳을 향해 따스한 눈길과 손길을 내밀 때 좀 더 접근 가능할 것이라고 유추해본다. 

'없음'이 '있음'으로 가는 지름길 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