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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플레인(Mansplain)
어느 날 아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라는 이상한 제목의 책을 읽더니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물을 때 마다, 아니 묻지 않아도 가르칠려고 든다'는 훈계와 함께 이 단어를 머리속에 주입 시켰다.
뉴욕타임즈가 2010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는 Man explain을 줄인 이 말은
레베카 솔닛이라는 작가에게 서평 몇줄 읽고 설명하려든, 심지어 자기가 이 책의 저자라고 밝혀도 그럴리 없다는 태도로 장광설을 편 어느 자뻑 남의 불편한 기억이 이 책을 쓰게 했다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 단어는 이후
백인의 우월감을 나타내는 whitesplain,
우파의 잘난척을 의미하는 rightsplain이라는 파생어를 만들냈다고 한다.
이는 결국 남자건 백인이건 우파이건 간에 힘의 우위에 있는 자의 뻐김을 의미 하는 powersplain이라는 단어로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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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에 처한 욥에게 찾아온 친구들이 욥을 대하는 태도를 보자.
고난이 주는 교훈이 있다는 엘리바스,
참새라는 이름처럼 재잘 거리며 숨은 죄를 고백하라는 소발,
외침의 주인이라는 이름대로 '네 시작은 미미하지만 나중은 크게 될 것이니 순결하고 정직하다면 주께서 베푸시는 회복을 기대하라'고 큰소리 치는 빌닷,
그리고 공손한듯 시작해서 염장지르는 어린 엘리후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두는 약자 욥을 가르치려 든다.
마치 "오빠가 가르쳐줄께, 잘 들어봐~"하며 뒤로 한껏 몸 젖히고 목소리 깔고 폼을 잡는 것처럼..
그들 앞의 욥은 마치 잘난 오빠 앞의 어린 아녀자, 부유한 백인 앞에 선 가련한 홈리스가 되버린 듯 하다.
그러나 만약 욥이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면 이 친구들이 그럴 엄두나 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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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갈망한 것은 도치된 정의의 회복이다.
욥의 친구들은 벌어진 현상을 통해 욥의 불의에 대한 진단과 해석을 논한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항변하는 욥이나, 무언가 잘못한 게 있으니 그런것 아니겠냐는 친구들이나, 공통점은 결국 고통의 원인에 대한 자의적 해석 뿐 이다.
그걸 뒷받침해주는 근거는 파워를 소유하였느냐 여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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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상의 이유와 해석을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는 분은 절대자 하나님 뿐이다.
욥기 38장 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길고 큰 설명은 이를테면 'Godsplain' 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설명하실 자격이 있으심만 말씀하실 뿐,
굳이 일의 시말을 설명하시지 않으신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땅의 기초를 세운 하나님 자신 만이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실 수 있지, 너희들이 어디 엄두나 낼 수 있더냐고만 하실 뿐 더 이상의 친절한 설명은 난망하다.
역대급, 최강 맨스플레인 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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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을 읽을수록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정의롭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고루 분산되지 못하고 편파된 힘은 있어도
원래 도치된 정의란 과연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수선한 현실 앞에서 무엇을 구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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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거나 가르칠 일이 아니라
고통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는 어렴풋이 알겠다.
욥기는 정의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 그 너머의(more than Justice) 어떤 것,
아마도 따스한 손길,
자비(mercy)를 갈망하라는 책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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