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초등학교 시절, 참관수업이나 학부모 면담이 있으면 어머님들이 학교에 오셨습니다. 어머님들이 다녀가고 나면 아이들끼리 은근히 서로의 어머니 모습을 비교해보기도 했었죠.
내심 저는 우리 어머니가 너무 화려하지도 않았으면 좋겠고 그렇다고 기죽을 정도로 너무 초라하지도 않기를 바랬습니다. 적당히 기품있고 수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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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무렵 활동했던 교부 키프리아누스 (Thascius Caecilius Cyprianus, 200년?-258년)는 엄격한 교회론을 주장했는데,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더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는 말로 유명하지요.
교회에 대한 그의 언급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그녀의 태에서 우리가 태어났다. 그의 젖으로 자랐고 그녀의 숨결로 생기가 돋았다. 우리를 지켜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자기 자녀인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이끈다. 교회에 속하지만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은 교회의 약속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는 자는, 그리스도의 상급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방인이고 버림받았으며 그리스도의 대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더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한다.' (The Treatises of Caecilius Cyprianus, Parker, 1839. - 318쪽)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더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한다는 그의 교회론은 후에 크리스텐덤 시대를 지지하는 중요한 의식구조의 한 기둥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요.
아버지는 독립운동하러 만주에 가셨다고 생각해도 좋고, 아니면 사우디에 외화벌이하러 가셨다고 해도 좋습니다. 여하튼 아버지는 멀리 타국에 계셔서 어머니 홀로 아이들을 키우시느라 고생하시는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삯바느질이나 동네 품삯질로 밤낮없이 일하시면서도 자녀들이 혹시나 기죽을까봐 단정한 옷차림도 챙겨주시고 준비물도 근근이 챙겨주시는 어머니.아이들이 곁길로 들어설까봐 저녁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면서 올바른 사람이 되라고 귀에 못이 밖힐 정도로 잔소리 하시는 어머니.
이런 어머니의 모습에 걸맞는 모습의 교회는 이렇게 연상됩니다.
세멘 벽돌에 슬레트 지붕 단층건물에 단열이 되지않는 홑 유리창, 그리고 양초칠로 번들번들한 나무바닥에 방석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앉은뱅이 책상이 구석에 비스듬히 세워진 풍경의 교회,
교부가 그리던 교회는 그런 어머니셨을 것 같습니다.
3세기 초반의 서구사회에서 교회는 아직 소수자로 핍박이나 냉소속에서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던 시대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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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의 화려한 대형 교회는 그런 어머니와 도저히 매칭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어머니라고 부르기보다는 차라리 요즘 세태에 맞게 '맘'이라고 부르는게 더 어울릴것 같습니다.
파출부를 고용하여 온갖 좋은 음식으로 영양 공급을 넘치게 해주는 맘. 영어면 영어, 수학이면 수학, 미술이면 미술, 심리 상담이면 심리 상담, 귀한 자녀들이 기죽을까봐 최고 스펙의 강사들로 일주일 스케쥴을 꼭꼭 채워주는 맘.혹시나 허름한 애들과 어울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볼까봐 배경 좋은 친구들로 동아리를 만들어 주는 맘.
일급 맘카페 맘이나 영화 기생충의 부잣집 마나님 이미지가 오늘의 대형교회 이미지같습니다.
이런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은 자녀들은 스펙은 화려할지 모르지만 문제를 발견하고 풀어내는 능력은 오히려 퇴보하겠죠. 아니 아예 문제의식 자체가 없을 겁니다.의존적이고 수동적인 무기력한 학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맘의 케어를 받는 자녀들은 모여서 하라는 것들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 주도 면밀한 맘 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바이러스 역병같은 간단한 위기 속에서도 자녀들은 방향감각을 잃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펴놓고 일상 속 삶의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적이 없는 한국교회는 모양은 화려하지만 생기가 사라진 나무같아서 약한 바람에도 뿌리채 흔들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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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영화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희생'이라는 유작을 남겼습니다.
이 영화에서 은퇴한 전직교수인 알렉산더는 막내아들과 함께 바닷가에 죽은 묘목 한 그루를 심습니다. 자폐증으로 말을 못하는 아들에게 한 수도승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수도승이 3년간 죽은 나무에 물을 주어 마침내 살려냈다는 전설이죠.
영화 후반부에서 어린 아들은 말문이 트이면서 이렇게 독백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그게 무슨뜻이죠?' 그리고 아빠와 함께 물을 주었던 죽은 나무는 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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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한국교회, 이제 사치스럽고 분주한 우리들의 어머니는 제발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화려하지만 생기를 잃어가는 우리들 어머니에게 몇년이건 꾸준히 양동이로 물을 퍼나르고 싶습니다.
무엇이 우리 아버지의 가르침인지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사는 길인지를 다시 성찰하는 어머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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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제발 정신차리세요.이러다 아버지 오시면 엄만 쫒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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