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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삶책(책과 문화)

보이지 않는 세계(서평)

by kainos 2020. 12. 5.

 

 

 

 

 

보이지 않는 세계(마이클 하이저, 좋은 씨앗)

이 책을 읽고 나니 고민이 생겼다. 소개할까 말까, 한다면 누가 읽는 게 좋을까, 보통의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어떤 유익이 있을까 등의 고민이었다. 이 책의 번역본을 추천하신 분들의 면면을 보면 우리나라 구약학계를 대표하시는 분들이라 할 수 있다. 추천사의 내용 또한 성경을 읽는 새로운 눈을 열어준다는 것이 중론이어서 믿고 책을 읽어도 충분할 것 같다. 

하지만 차분하게 이 책을 다시 살펴보자. 

일단 불만스러운 부분부터 짚어보자. 무엇보다 이 책의 표지 디자인과 제목의 번역이 마땅치 않다. 이유인즉슨 원제목 'unseen realm'을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번역하고 시력검사표를 표지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unseen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던, 보이지 않던'(that cannot be seen; that is not seen)의 의미와 '이전에는 보이지 않고 가려졌던'(not previously seen)이라는 의미이다. 

뭔가 불분명(obscure)하고 신비한(mysterious) 세계가 있는데, 이 영역은 내가 눈을 부릅뜨거나 가늘게 뜬다고 보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류의 세계관이나 관점을 취하지 않고는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력검사표를 표지로 제시한 것은 원작의 제목과 잘 부합하지 않는다. 차라리 원작의 표지가 제목에 더 나아 보인다. 

제목도 그런 의미가 드러나도록 '보이지 않던 세계'나 '감추어진 세계'라고 했더라면 어떨까 싶다. 

 

단점 지적은 이 정도로 하고 이 책의 유익을 살펴보자.

저자는 고대사와 고대언어(히브리어 셈어)로 석사와 박사를 취득하고 최고의 성경연구 프로그램인 로고스 바이블(FaithLife)소프트웨어의 상주 학자라는 자신의 장점을 바탕으로, 방대한 고대 근동의 신화에 관한 지식과 철저한 성경 신학적 자세를 유지하면서 성경의 난해한 구절들을 새로운 접근법으로 해석한다.

이 책은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하나님, 신들로 번역되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성경의 해석을 헷갈리게 한다는 점, 마치 커다란 양탄자에서 부풀어 오른 실오라기 하나같은 이 꼬투리를 붙잡고 전체 그림 중에 우리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다시 읽어낸다. 

그동안 우리는 성경이라는 그림을 구속사라는 한가지 틀로만 보려 했기에 보이지 않거나 볼 수 없었던 신비한 밑그림을 저자는 복원시켜 드러낸다. 

CSI 수사관이 증거 더미 속에서 혈흔이라도 찾아내듯이 저자는 첫 번째 단서인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꼼꼼하게 분석한다. 

'하나님으로 번역되는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편재성, 전능성, 주권의 속성을 지닌 신적 존재를 떠올리나 성경 기자들은 이 단어를 그런 속성과 연결하지 않았고 오히려 엘로힘이라는 단어로 그 속성이 일치하지 않는 대략 여섯 종류의 다른 존재를 가리킨다'라고 저자는 밝혀낸다. 저자는 엘로힘은 신적 속성과 관련된 용어가 아니라 영적 세계의 거민을 지칭하는 단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구약 기자들은 여호와가 엘로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엘로힘까지 여호와는 아니라고 이해했다'라는 문장을 본 순간 독자들은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어서 둘째 단서로 천상회의(Divine council)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엘로힘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는(Divine image bearing) 형상 담지자(imager)로 인간을 지으시기로 하셨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을 형상화한 존재이기에 인간에게 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미 하나님의 형상 담지자 신분을 지닌 인간이 다시 자기 손으로 나무나 금속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자기 본분을 망각한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세울 수 있는 존재는 전능자뿐인데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의 형상을 만들려고 시도한다는 죄까지 더해져 이중의 죄를 짓게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 담지자에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인, 즉 섭정(regent)의 역할이 주어진다.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다스릴 책임이 있고 동료 형상 담지자인 사람들의 존엄을 지켜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과 신적 존재들의 범죄로(창 6:1-4) 이 땅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멀리 벗어나게 된다. 대표적인 난해 구절인 창 6:1-4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불순종하며 사람의 딸들과의 사이에서 네피림을 낳게 된다는 내용이 있다. 이 부분은 베드로서(벧후 2:1-10)와 유다서에 범죄한 천사들을 지옥에 가둔다는 내용과 함께 주해자를 난감하게 하는 본문이다. 

 

저자는 이런 본문들의 해석을 또다른 단서로 제시하는데 이를 통해 성경해석의 새로운 시야를 제시한다는 점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신적 존재들의 불순종에 동참한 인류는 바벨탑을 쌓는 반역을 저지르자 하나님은 인류의 언어를 혼잡게 하고 범죄한 인류를 열국으로 흩으신다. 

이로 인해 우주적 지형과 피아의 경계가 재설정되고 하나님의 이 땅 복원 전략은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을 통해 새 판이 짜여지고 드디어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 

 

이 책을 읽고 성경을 읽으면 마치 성경을 펼쳐놓고 앞쪽이 아닌 뒤쪽에서 읽는 느낌이든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눈을 열라는 저자의 권고를 받아들이면 복음서와 서신서의 종말론적 또는 영적 세계가 다시 보이게 된다는 큰 유익이 분명히 있다. 

특히나 그동안 막연히 보이거나 잘 읽히지 않던 계시록이 제시하는 그림 언어의 상당 부분을 입체적으로 보게 해주는 편광안경을 장착하게 되는 듯 하다. 

 

 

다행히 구약 외경과 위경, 신구약 중간기 문헌, 사해사본 등을 신학교에서 수강하고 배경지식을 접할 기회가 있었던 나로서는 저자의 이런 주장이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묵상과 설교 이외에 따로 성경의 배경지식을 흡수할 기회가 적었다면 이 책을 이해할 때 상당한 혼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독한 약도 잘 달여 먹으면 보신이 되듯이 영적 세계에 눈을 뜨게 해주는 이 책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피한다면 실제 신앙생활에 상당한 동력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본다. 

혼탁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재정립되고, 세상 속에서 함께 전투하며 살아가는 동료 신자들이 귀하게 보이고, 일터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 속에도 여전히 신의 형상이 있기에 그들이 믿건 믿지 않건 존엄히 여기게 될 것이다. 

나아가 새 하늘 새 땅, 회복의 날을 더 갈망하게 되며 오늘을 그날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형상 담지자일 뿐 아니라 언젠가 신적 가족의 일원으로 불러주실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힘껏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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