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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신학

찬양대

by kainos 2022. 5. 31.

사랑하는 찬양대원 여러분

여러가지 불편한 여건을 마다하지 않고 다시 찬양대로 모이시는 여러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코로나 긴 터널을 무사히 건너고 다시 활동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무척 설레며 긴장도 됩니다. 이런 편지가 다소 쑥스럽지만 한마음으로 새 출발하자는 뜻이니 너그럽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예배를 생각할 때 이런 그림이 그려집니다.
예배는 무한 불멸의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추하고 더러운 유한 필멸의 존재물에게 손을 내미실 때, 황송함과 두려움과 감격에 어찌할 바 몰라 신발을 벗고 옷깃을 여미며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마침내 내미신 손을 겨우 붙잡고 추는 2인무 발레(pas de deux 빠드되)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그 감격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기에 어쩌면 외마디 비명 같은 노래로 그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리액션이지 싶습니다.
그 직분을 우리가 맡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되심(진)과 선하심(선)과 아름다움(미)을 선포하고 찬양합니다. 그러기에 그 분의 이름을 찬양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일상을 살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한결 같으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상태는 널뛰기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이 걱정 없고 감사할 일 뿐인 상황에서 드리는 찬양도 있지만(그것을 “그리하여의 찬양”이라고 해봅시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드리는 찬양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찬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나아가 전혀 나아질 소망도 없고 암울한 상황에서 드리는 찬양, 이름하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찬양”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 찬양을 부를 수 있는 힘은 우리의 여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이루신 그 역설적인 승리로 인하여 우리가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침체되고 낙심되는 상황에 처할지라도 소망의 끈을 놓지 않는 찬양대원이 되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제럴드 무어(1899-1987)라는 유명한 반주자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는 평생 솔리스트 아닌 반주자의 길을 걸으며 수많은 연주자를 뒷받침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967년 런던에서 열린 그의 마지막 연주회는 40여 년 오로지 다른 성악가를 돋보이게 한 그를 기념하기 위한 헌정 음악회로 열렸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반주자를 위해 열린 음악회에서 그의 은퇴를 축하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성악가들이 함께했고 제럴드 무어는 여전히 반주로 성악가들의 음악을 빛내 주었습니다. 마지막 연주를 마치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내가 반주자의 중요한 덕목인 조심스러운 태도를 잊어버리고 연주를 한 것 같습니다. 사실 나는 지난 40년 동안 내 반주 소리가 너무 컸나 항상 의심하고 걱정했거든요.”
그리고 이런 말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독주곡을 연주하겠다고 하였을 때 모두 화려한 연주곡을 기대했지만, 그는 슈베르트의 “음악에”(An die Musik) 라는 소품을 연주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랑과 감사를 이 연주로 대신합니다. 이 노래는 음악에서 찾는 예술의 거룩함에 보내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나에게 음악은 천국을 이땅에 비춰주는 거울이며 위로자입니다. 음악 없는 내 인생이 어떠했을지요, 음악은 나에게 감사이며 축복입니다.”

저는 제럴드 무어의 인생관, 음악관이 우리 찬양대원들의 본받아야 할 신앙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스포트라이트를 연주자들에게 돌리고 자기의 교감을 음악에서 누렸듯이, 우리는 모든 영광의 불빛을 주께 올려드리며 주님과 깊은 교감을 나누는 반주자의 삶을 살기를 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감사이고 축복이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의 감격과 단정한 일상, 낙심하지 않는 마음과 서로를 높이는 겸손함으로 우리 찬양대로 다시 모입시다.

건강과 평강을 기원하면서
예배 음영위원장 이철규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