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쯤이다. 찬찬한 성품으로 환자들의 신뢰를 받던 페이닥터 선생님께서 근관치료를 도맡아 하셨는데 어느 날 환자의 굴곡진 신경을 잘 찾아 드리려다 뜻대로 되지 않고 파일 끝이 부러져 남게 되었다. 선생님은 그 환자에게 최선을 다했으나 아쉽게도 이런 일이 발생한 상황을 정직하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그 환자는 나에게 면담을 요청하며 해결책을 요구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교회 청년이었는데 언제 봤냐는 식으로 다가오는 그에게 마음이 많이 상했다.
근관치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설명하려고 여러 가지 대응할 말을 준비하고 환자와 마주 앉았다. 부글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지 미소로 가렸다. 환자는 조목조목 따지며 내 속을 더욱 긁었고 나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래 차라리 참을게 아니라 막말을 퍼붓고 끝까지 가보자! 다시 얼굴 안보면 되지 억지로 참을 필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넘실거리던 차에, 순간적으로 머리 속에 스파크처럼 한 생각이, 아니 한 그림이 내 머리를 날카롭게 찌르고 지나갔다.
지금 이 대화를 두 존재가 듣고 있다. 한편에는 내 감정에 계속 기름을 부으며 임계점을 넘어 폭발 시키게 해서 싸움으로 번지기를 원하는 사탄이, 반대편에는 묵묵히 내 입술 끝을 바라보며 어떤 말이 나올지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죄가 없으셨지만 최후까지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으셨던 예수께서 이 대화를 듣고 계신다는 생각, 지금 내 입에서 떨어지는 말 한마디를 숨죽여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내가 준비한 말들을 감정과 함께 쏟아 부을 때 슬프게 발걸음을 돌이키실 그분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내 의도와 정 반대의 말들을 하고 있는 내 자신에 나도 놀라고 있었다. ‘얼마나 실망했겠냐, 좋은 치료를 원했는데 잘 안돼서 우리 마음도 무겁다. 지금 증상이 없지만 네가 앞으로 이 치아를 사용하는데 어려움 없도록 앞으로도 모든 정성을 다하겠다. 그 치아의 수명이 다하여도 그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이 내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그러자 내 맞은편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지는 사탄이 보이는 듯했고 내 뒤에서 파안대소 하시며 껄껄 웃으시는 예수님의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크게 웃으시는 그 분의 기쁨을 내 온몸으로 느끼며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그분은 그렇게 내 진료실에 찾아오셨다.
그 후 10년 흘러 그 청년은 병원을 다시 찾았다. 그간 잘 사용했지만 최근부터 아파온다고 하였다. 뿌리가 금이 가 더 이상 쓸 수 없어 이를 뺐고 그 청년이 원하는 대로 임플란트를 해주었다.
주변에 깊은 울림과 파동을 남기시며 웃으시던 그때의 주님 모습이 그립지만 잔잔하게 미소만 지으셔도 이젠 내 마음 속에 새겨진 그 울림은 그 속에서 함께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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