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던 어느 날 그날도 아침 묵상을 통하여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을 입고 출근하였다. 점심시간이 다가올 무렵 정기적으로 예방 관리를 잘 받으셔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60대 여자 구환이 한 분 찾아오셨다.
잇몸이 부었다고 해서 보니 평소와 다르게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 그분의 잇몸을 보고 원인이 될 만한 것이 없어 보여 지나가는 말로 혹시 피곤한 일이 있으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분은 얼굴색이 어두워지며 한숨을 내쉰다.
“어젯밤 한잠도 못 자고 눈을 붙일 수 없었어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제가 벌 받은 거에요. 제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신실한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지만 믿지 않는 시댁에 시집와 신앙을 다 까먹고……. 제 아들이 남들 부러워할 수재인데, 최근에 손자를 보았지요. 근데 정상이 아닌 것 같아요. 팔다리 움직이는 거나 발달이 다소 늦은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아 걱정이 태산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그의 저서 ‘성서와 의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어떤 병이든 두 가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첫째는 그 질병의 성질, 원인, 발생 등의 과학적인 문제이고, 둘째는 그 질병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영적인 문제다.
따라서 질병은 병리적인 진단과 영적인 또는 질병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진단의 두 가지 진단을 요구한다. 전자는 객관적이며 의사가 내리는 것이고 후자는 주관적으로 환자 자신이 자기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양심의 활동을 통해 내린다. 질병은 그런 면에서 때론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의사로서 우리는 첫째 진단에 집중해야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환자 스스로 둘째 진단을 내리는 것을 돕거나 적어도 방해하거나 무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는 우리에게 심적 부담을 주기 때문에 의사들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닫기 일쑤이다. 환자들의 작은 신음에 귀 기울여야 이러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손자의 안부를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아직은 발달기이니 너무 성급한 결론은 내리지 마시고 전문의가 내리는 최종 결론까지 기다려 보자고 위로하였다. 그리고 내가 겪은 이야기를 해 드렸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 둘째 아이를 병원 데리고 다니느라 애 엄마와 내가 겪은 힘들었던 일들과 한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나 자신을 자책했던 일들. 그리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고 오히려 감사하게 된 일들. 이젠 건강하게 잘 커가고 있는 일들을 두서없이 나누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안타까움에 마음이 아팠다. 그분께 이 모든 일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고 결국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려고 하심(요한복음 9:3)을 나누었다.
다만, 당신의 양심이 그렇게 호소한다면 부디 신앙을 회복하시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권하였다. 그리고 간단한 소독을 해 드렸다. 그분은 이런 위로를 듣게 될 줄 몰랐다며 왠지 발걸음에 이리로 이끌렸는데 정말 오길 잘했다며 들어올 때보다 훨씬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약속은 없지만, 그분은 다시 찾아오셨다. 어제 나와 나눈 얘기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 수요일 저녁 예배를 드리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미쳤고 가까운 교회로 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로 오랜 세월 만에 드리는 예배는 뜨거운 눈물로 범벅되었지만, 감격스러웠다고 말한다. 말씀하시는 모습 속에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이 배어 있었다.
미국기독의사치과의사회(CMDA)에는 Saline Solution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어떻게 하면 일터를 사역지로 전환해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내뿜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도와주는 것으로 그 이름이 갖는 취지가 흥미롭다. 소금처럼 너무 진하지도, 물처럼 너무 연하지도 않은, 생리식염수의 적정 농도 대화로 그리스도의 구원 복음을 진료실에서 나누자는 것이다.
우리가 환자의 고통을 들어주고, 배려심 깊은 부드러운 위로의 대화를 나누다 보면 환자 스스로 질병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영적인 진단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환부뿐 아니라 환자의 영혼에 따뜻한 생리식염수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부어주자. 스스로 선한 양심이 살아나서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참된 의사의 직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참고자료>
1. 성서와 의학: 그리스도인 의사를 위한 복음 | 폴 투르니에 저, 마경일 역. 다산글방, 2004
2. Saline Solution (http://www.cmda.org/WCM/corve/orders/product.aspx?catid=29&prodid=860)
이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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