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계 5:3-7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
인생은 점묘화.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점 하나.
멀리서 보면
그것이 눈이 될지 코가 될지
아니면 보석이 될지...
....................................
인생은 알 수 없는 퍼즐의 연속이다. 아니 어쩌면 퍼즐 그 이상이다. 퍼즐은 일단 전체 그림이 무엇인지 실마리를 찾으면 퍼즐 판을 채우는 것은 시간 문제이지 결국은 해결된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어느 순간 퍼즐의 명암이 바뀌기도 하고 색체가 바뀌기도 하고 심지어 그림판이 바뀌기도 한다. 어쩌면 인생 퍼즐은 가끔 역설의 전환점을 만난다.
알파고와 딥마인드 알고리즘, 인공지능이라는 단어가 얼마전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적이 있다. 이세돌 9단을 이긴 인공지능을 알파고라고 하는데 이것은 나중에 알파고 제로라는 신형으로 발전했다. 알파고는 인간 대국자들의 기보를 통해 학습되었지만 알파고 제로는 아무런 학습 과정없이 스스로 터득하여 알파고에 100전 100승을 거두는 놀라운 수준까지 발전한다. 이제는 더 이상 알파고 개발을 하지 않기로 구글 딥마인드는 결정했다고 하는데 더 이상 인간과의 대결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어서 두려운 일 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알고리즘이란 주어진 제한 조건에서 최상의 결과를 찾아가는 산술적 과정이다. 과학과 기술이 산술적 최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면 신앙은 상식과 합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의 생애를 잘 살펴보면 우리는 정말 깊고 심오한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역설을 통해 우리의 시야는 닫혀진 세계로부터 영원을 향해 열리게 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역설적 삶과 사역을 살펴보자.
영원 전부터 계시던 이, 전지 전능하신 이 그리고 시간과 공간 밖에 계신 이가 이 땅에 오셨다. 그것도 영광스런 절대 군주의 모습이 아닌 가장 초라한 형편의 모습으로 오셨다. 창조주가 피조물로 오셨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성육신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극히 미련해 보이고 말이 되지 않는 선택을 알고리즘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런 역설은 닫힌 시스템 안에서 본다면 비상식적인 결정이다. 영원을 향해 시스템을 열어 젖혀야만 그 타당성이 추정되고 수긍될 뿐이다.
그 뿐이 아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이가 스스로를 인자(Son of Man)라고 부르셨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뜬금없는 단어는 다니엘서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단 7: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 본문에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즉 성부 하나님께서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시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이 그를 섬기게 한다는 내용이다. 이 표현은 분명 세상을 심판하시는 전능하신 주의 모습을 묘사한다.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자리 매김하셨다. 1세기 대제국 로마의 핍박아래 신음하던 유대인들에게 자칭 인자라는 이가 나타나셨다. 그들은 아마도 다윗왕 같은 분이 즉위하시고 다스리시는 영광스런 이스라엘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복음 1세대의 성도들 입장에서 스스로 인자라고 칭하시는 분의 모습은 다니엘서의 심판주의 모습과 도저히 연관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평범한 순회 전도자, 패배자들의 동반자, 말씀은 왕처럼 하시지만 삶은 노예 같으신 분을 보고 많은 실망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인자의 역설이다.
간략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적인 역설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분의 행하심 속에서 역설을 살펴보자.
계시록 5장에서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봉인된 두루마리를 본다. ‘누가 과연 이 봉인을 뗄 자격이 있는가?’라고 천사가 외치지만 아무도 두루마리를 펴볼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알고 요한이 슬피 운다. 왜 울까?
성도들은 이 땅에서 신음과 탄식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그들의 고통을 신원(갚아주심)해 주시기를 간청한다(계 5:8). 누군가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받아서 펼쳐 읽고 선포해야 악을 소탕하고 성도들을 구해줄 텐데 그것을 펼칠 자격 있는 분이 없으니 악은 승승장구하고 성도들의 신음은 끝없이 지속되겠구나 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요한은 슬퍼하며 운다.
그런데 장로 중 한 사람이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봉인을 해제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저 분이 우리의 승리자이시다’라고 외치며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지만 그곳엔 비참하게 죽임 당한 어린 양이 계셨다. 그리고 죽임 당하신 이가 이기신 분이라고 외친다. 믿어질까? 여기에 가장 큰 역설, ‘이기다의 역설’이 담겨 있다. 처참한 죽음이 바로 승리라는 이김의 역설을 묘사하는 계시록 5장의 역설을 학자들은 계시록의 중심 환상이라고 말한다. 이 중심 환상은 계시록 6장 이하에서 이어지는 심판 환상에 시동을 걸 수 있는 스타트 모터이다. 중심 환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을 처벌하는 심판 환상의 근거이며 동력이다. 이 역설에 ‘십자가 없이 왕관이 없다(No cross no crown)’는 중요한 신학적 진리가 담겨있다.
환상에 대해 좀 더 부연하면 계시록은 크게 네 개의 환상이 묘사된다. 계시록 1-3장에 예수님의 모습이 찬란하게 묘사되는 첫째 환상이 있고, 4장과 5장에 천상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예배하는 중심 환상이 있다. 6-20장까지 이어지는 심판 환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21-22장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성도가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마지막 환상이 있다. 첫째 환상에 이어지는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에는 각 교회에게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있다. 중심 환상에는 어린 양이 죽음으로 ‘이기시고’ 봉인을 해제하신다. 죽으심으로 이기셨기에 인을 뗄 자격이 있다. 죽으심이 곧 이기심이다. 죽으심으로 신실함을 '지켰기' 때문에 이기신 것이다.
세상의 관점과는 다르게 계시록의 이기다(nikaw)라는 단어에는 신실함과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있다. 죽음으로 이기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신실하게 살기위해 저항하며 거부하며 따라가는 이 전체 과정을 '지키다(tereo)'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신실함을 지키고(keep), 하나님은 영원하신 약속으로 우리를 지키신다(maintain, protect). 그래서 계시록의 가장 중심이 되는 단어로 '지키다'라는 단어를 꼽을 수 있다.
요한 계시록이 말하는 '이기다'(nikaw)의 역설을 비일이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이기다’라는 단어는 역설적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기심이 이김의 모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이기심(5:5-6)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의 이김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죽음을 무릅쓴 증언으로 이뤄진다(12:11). 예수께서 교회를 향해 이기라고 권면하는 것은 우리를 불의로 끌고 가는 타협에 대항하여 굳게 서라는 권고이다. 이김은 순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러 종류의 고난을 지속적으로 견디는 것이다. 이김의 증명은 어떻게 죽느냐가 아니라 '삶' 전체가 이기는 자의 특징지어지는 지 여부레 달려있다.
그리고 ‘이기다’가 분사 용법으로 사용됨을 감안할 때 참된 신자라면 지속적으로 이겨내야 한다. '지키다'라는 단어가 분사로 병행되는데 이기는 것은 믿음으로 인내하며 선한 행위로 이해된다. 이김은 한 개인의 총체적인 믿음 생활의 승리를 말한다.
이기는 자에게는 약속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구원의 모든 복이 주어진다. 안전과 거주지, 능력과 음식과 옷 그리고 이름 등의 삶에 필수적인 것들도 제공된다. 이김은 한 개인의 총체적인 믿음 생활의 승리를 가리킨다. 자신이 "이기는 자"임을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리차드 보컴이라는 학자는 계시록을 쉽게 읽는 비법으로 먼저는 주기도문으로 읽자고 제안한다. 그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도 이루어 지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핵심이며 거룩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시작할 출발점이다는 것이다. 둘째로 계시록의 모티브를 통해 아름다운 찬양들이 많이 작곡되었기 때문에 계시록을 찬양으로 읽자고 제안한다. 대표적으로 헨델의 오라토리오인 ‘메시아’이다. 5장의 모티브를 이용한 죽임당하신 어린 양이라는 찬양도 있고 19장을 모티브로 한 할렐루야라는 찬양도 있다. 왜 할렐루야가 메시아의 피날레 아니고 '죽임당하신 어린 양'이 피날레 곡인지에 대해 아쉽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계시록 4장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신.구약 교회를 대표하는 24장로가 머리의 관을 벗어드리고 하나님께 경배한다. 그리고 5장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취하시자 24장로와 네 생물이 자신의 보혈로 백성을 구원하신 어린 양께 인봉을 떼기 합당하심을, 그리고 둘러싼 수 많은 천사들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고백한다. 그러자 우주 공간의 모든 피조물이 능력과 부 지혜 힘과 존귀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과 어린 양께 돌리고 이어서 수 많은 천사들이 아멘으로 화답한다. 이것이 천상에서 울리는 우리의 영원한 찬송의 모델이다.
계시록은 묵시문학이다. 묵시문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초월성인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현재가 미래가 만나고 여기와 그곳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지금 여기에서(here & now) 벌어지는 일은 그곳 천상에서 그때(there & then) 일어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래에서 구현된 승리는 현재 우리의 삶에 힘이 되고 나아가 팍팍한 현재를 영원의 관점에서 살아가도록 힘을 얻는다.
찬양을 부를 때 이 장면을 연상해보자. 천상에서 승리한 공동체가 고백하며 부르는 찬송과 아멘, 그것은 지상의 교회 공동체의 목표이다. 동시에 현재의 교회 공동체는 미래의 현존이다. 그것을 생각하고 바라보며 찬양할 때 온 몸에 전율이 울린다. 오늘을 영원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영원을 향해 오늘 작은 씨앗 하나를 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이 걱정없고 감사할 일 뿐인 상황에서 드리는 찬양도 있다. 그것을 ‘그리하여’의 찬양이라고 이름을 붙여보자. 그러나 고난과 역경속에서 드리는 찬양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찬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아가 전혀 나아질 소망도 없고 암울한 상황에서 드리는 찬양, 예컨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찬양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찬양을 부를 수 있는 힘은 우리의 여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역설적인 승리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
주님 주시는 이 소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싶다.
요일 5:4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세상을 이긴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신실함으로 이기고 지키는 자가 되고 싶다.
#삶으로_읽는_요한계시록 #계시록묵상 #계시록_쉽게_읽기
'요한계시록과 종말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을 읽는 유익- 요한계시록의 일곱 복 (0) | 2020.05.04 |
---|---|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 (0) | 2020.05.02 |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묵상(요한계시록 21장) (0) | 2020.05.02 |
계시록 강의 (0) | 2020.05.02 |
삶으로 읽는 요한계시록/교회 (0) | 2020.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