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록의 일곱 복 >>
요한계시록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이 일곱 번 나옵니다.
seven macarisms 또는 seven blessings 이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에 대한 주해도, 의미에 대한 연구도 많지 않습니다.
2012년 웨스트민스터 신학 대학원 대학교에서 "요한계시록의 일곱 macarism에 관한 연구"(이필찬 교수 지도)로 신학석사논문을 작성하였습니다.
리차드 보컴을 비롯하여 최근 출간된 마이클 고먼의 "요한 계시록 바르게 읽기"에서도 7개의 '복이 있도다'는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세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아래 내용은 일곱 macarism을 주해한 논문을 바탕으로 2012년 치과의료 선교대회에서 기독 치과의사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내용을 일부 수정하여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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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 또는 말씀의 정신대로 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손해 보면서 살라고 하는 것 같은 데 이러한 삶을 산다면 우리에게 어떤 보상이 있지요?’ 라는 질문이죠. 이런 질문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 한번 눈을 멀리 들어 봅시다. 무엇이 그리고 어떤 생각이 우리의 행동과 삶의 방식을 바꿔 놓을까요?
사도 행전에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이 ‘도’를 전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Way라고 되어 있던데 이는 복음에 반응하여 변화된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이 변할 수 있을까?'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은 우리가 과거에 받은 은혜에 의해서도 물론 바뀝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은혜의 눈물도 곧 마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은 미래에 대한 인식 즉,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 삶의 방식도 바뀐다는 것을 요한계시록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계시록에 대해 참 많은 오해들이 있어왔고 아직도 있습니다.
가장 큰 잘못은 계시록을 토정비결 읽듯이 읽으며, 어떻게 하면 미래에 대한 정보를 좀 얻어 볼까 하는 자세로 읽는 것 입니다. 특히 세대주의적 성경관은 우리에게 이원론적 사고를 갖게 하여 ‘구원만 받으면 되고 이 땅에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Christian도 아니고 Non-Christian도 아닌, 단순무식하고 무례한 Unchrsitian이 되어 버립니다.
계시록은 심판이나 종말의 시기를 알려주려고 쓰여진 것도 아니고 이를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 지를 알게 해주려고 쓰여진 것도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다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성도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편지, 즉 공동회람 서신입니다.
계시록은 신실한 자들에게는 더욱 신실하게 살자고 격려하며, 실족한 자들에게는 돌이켜 회개하라고 권면하면서 이 땅의 방식이 아닌 하늘의 삶의 방식을 살라고 권합니다. 이것이 복된 길이고 옳은 길임을 알려주며 이렇게 살라고 도전합니다.
종말과 현재, 하늘과 땅의 부조화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부조화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최후의 승리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사는 삶이야 말로 참으로 복된 삶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계시록을 읽을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계시록에 나오는 수 많은 비유와 상징들은 계시록 수신자들에게 이미지를 각인 시켜주기 위해 제시된 일종의 그림 언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상징적 그림 언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장난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계시록은 종말적 관점으로 현재를 바라보면서 살라는 것과 여기에는 불연속성과 함께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우리의 지평을 현재에서 종말로 여기에서 천상으로 확장시켜준다는 것입니다.
1. 일곱 복(Seven Blessings) - 계시록의 핵심 메시지
계시록에는 마태복음의 팔복처럼 7개의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학교의 급훈이나 교훈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러한 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줌으로 이런 삶을 권장하는 지혜 전승적 표현 입니다.
이 일곱 복을 학자들은 계시록 메시지의 핵심적 메시지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성도가 얻게 될 종말적 승리, 새 왕국에서 맞이할 축복, 윤리적이며 신앙 고백적인 진술이 담겨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그냥 읽고 ‘좋은 복이네’하며 감탄하라고 쓰여진 게(Reading Text) 아니라 이 말대로 실행하고 따르라는 글 즉, 실천 강령 같은 (Working Text) 것 입니다.
일곱 복은 계시록 본문 전체에 걸쳐 흩어져 있는데 절묘하게도 6개는 3쌍의 짝으로 이뤄 집니다.
1 과 6, 2와 5, 3과 4의 복이 있도다는 짝을 이루어 마치 X자 모양의 교차 구조를 보이는데 이 세 짝은 내용상 점진적으로 의미가 강화되면서 마지막 일곱 째 복에서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6 일의 창조 후에 심히 좋았더라 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일을 맞이 하듯이 여섯 개의 복은 일곱 째 복인 영원한 안식인 생명나무의 복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창세기에 제시되었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문화명령의 완결이 이뤄집니다.
2. 무엇이 복인가?
우리는 복이라면 현세적 축복만을 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의 저자는 우리의 관점으로는 마치 반전된 미러 이미지(mirror image) 같은 복을 복이라고 제시합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1과 6의 복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번과 6번에서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라 권면이 나옵니다. 이는 마치 책의 하드커버처럼 계시록 전체를 감싸줍니다. 계시록 주해에서 핵심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많은 학자들이 이 '지키다'라는 단어를 꼽습니다.
첫 번째 짝을 이루는 복에서 ‘자, 말씀 잘 들었지? 이제 들었으니 말씀을 지켜라’ 라고 권면하시며 우리를 복 있는 삶으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이 권면을 따라갑니다.
2와 5의 복을 살펴봅니다.
말씀을 지키라는 권면을 따라 좀 더 앞으로 나가보니 2와 5의 복에서 복인 줄 알고 따라갔는데 이 길이 알고 보니 죽음의 길로 연결됩니다. 복으로의 초대가 아니고 죽음으로의 초대입니다.
속았다 싶어 눈을 비비고 정신차리고 보니 '자 죽기까지 말씀을 지켰지?, 그것이 주 안에서 누리는 안식과 주님과 함께 다스림의 축복이야' 라고 말해 줍니다. 복있는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다시 부활로 이어지는 반전에 반전이 이어집니다.
마지막 셋째 짝을 이루는 본문(3과 4)에서는 '그러니 옷을 잘 지키고 혼인 잔치에 참여해라' 라고 합니다.
계시록이 말씀하는 복은 죽음과 부활로의 초대 이지만 이 초대는 이생과 영생의 연속성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말이 되지 않는 초대였을 것입니다.
이 초대가 이끄는 곳은 말씀을 지켜 주 안에서 죽는 죽음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믿고 오늘을 살되 영원의 관점으로 사는 삶입니다.
아무것도 변화 시킬 수 없는 죽음 이후의 영원의 날에 이르면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기에, 오늘 우리가 하루를 살아갈 때, 잡초같은 후회를 더 이상 심지 않고, 영원의 날 기쁨의 소재가 되는 묘목을 눈물로 심겠다는 결단의 씨 뿌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원의 관점으로 오늘을 사는 삶은 복된 삶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거짓된 복과 참된 복이 있다는 것 입니다.
복인 것 같으나 저주같은 삶도 있듯이 저주인 것 같으나 복된 삶이 있습니다. 이는 오늘 지상의 관점(here & now)으로는 알 수 없지만 저곳의 그 날 즉 영원의 관점(there & then)으로 만이 알 수 있고 평가되는 삶입니다.
3.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옷과 혼인잔치
* 청결한 옷
* 벌거벗음 - 우상숭배, 의롭지 못한 행동
* 옷- 명예가 훼손되지 않음, 성도 의 의로운 행동 • 혼인잔치에 꼭 필요한 성도의 신앙 인격과 그에 걸맞는 품행
* 혼인 잔치 - 신부이며 동시에 하객, 왕의 명예와 왕위의 승계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
* 평상복은 왕을 모욕하는 것일 뿐 아니라 왕의 기쁨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것
흰 옷과 혼인 잔치는 3과 4의 복을 해석하는 연결 고리 같은 중요 단어 입니다.
자 흰옷과 혼인잔치 에 대해 살펴봅시다.
이 내용은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로 하여금 벌거벗음을 보이지 않도록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벌거벗음이란 우상숭배, 성도답지 못하고 명예롭지 못한 품행을 말합니다. 따라서 옷은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신앙인격이며 명예가 훼손되지 않은 의로운 품행을 말합니다.
혼인잔치에서 우리는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이며, 동시에 하객이 됩니다. 우리가 혼인잔치에 참석한다는 것은 신랑이시며 동시에 잔치의 주인 되시는 왕께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반대로 왕의 초대에 불응한다는 것은 권위에 대한 모독이고 왕권의 계승을 부인하는 왕권에 대한 반역이 됩니다.
그러니 연회의복을 입지 않고 더러운 평상복을 입고 나타난다는 것은 왕을 모욕하는 것일 뿐 아 니라 왕의 기쁨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으로 반역의 죄를 범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혼인잔치에 반드시 필요한 흰 옷이란 신부로서 신랑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며, 동시에 초청자이신 왕의 명예를 드높여 드리는 성도의 신앙 인격과 그에 걸맞는 품행을 말합니다.
4. 지속적인 실천윤리
마지막 절정에 해당되는 일곱째 복에서는 옷을 빠는 것을 통하여 생명나무에 접근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이것이 영원하고도 측량 불가능한 복을 받는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러나 옷을 빠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단회적이고 수동적인 세례나, 시간의 제약이 있고 일회적인 순교에 비해 옷을 빤다는 것은 지속적이고 능동적 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생활을 하겠다는 끊임없는 결단이며, 증인으로 살겠다는 의지가 삶의 방식의 변화로 이어지는 가시적인 것 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것을 통하여 신앙인의 품격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를 높여 드리는 실천적인 윤리라고 계시록은 말하고 있습니다.
옷을 빠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나무와 영원한 안식의 성으로 들어가는 권세를 보장합니다. 그러나 불의를 행한 자는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하십니다.
영원한 기쁨으로 초대 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단지 한 순간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삶을 포기할 것 인가요, 아니면 영원한 날의 기쁨을 오늘 이곳에서 맛보고 누리며 동시에 더 큰 기쁨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눈물로 씨를 뿌리며 살 것입니까?
이것은 희생도 아니고 더 큰 행복을 얻기 위해 작은 행복을 유보하는 극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의미있는 삶이란, 오늘의 기쁨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날, 아무것도 변화 시킬 수 없는 그 날에 누리는 행복의 소재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이 땅과 공동체에 영원한 가치를 남겨주는 것입니다.
제로 섬같은 이 사회에서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하나 더 갖기 위해 경쟁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이 땅에 누구도 심지 못하는 영원한 가치를 더하면서 살 것 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선택은 영원한 후회일 수도 있고, 영원한 날의 영원한 기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기쁨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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