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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과 종말론

요한계시록 개관 - 4.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특징입니다.

by kainos 2020. 10. 15.

4.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특징

 

메츠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는 여러 형태의 문학 장르를 포함한 일종의 장서이다. 다양한 형태의 문학 작품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독자에게 호소한다. 다윗의 시편은 사람의 감정을 어루만진다. 율법서는 우리의 의지에 호소하며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우리의 반응을 요구한다. 서신서는 우리의 지성에 호소한다. 조심스럽게 인내하면서 숙고할 필요가 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의 상상력에 호소한다. 그렇다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은 아니다. 일종의 그림 언어와 같은 사실적인 진술을 포함한다.

 

요한계시록은 묵시와 예언의 성격을 지닌 서신으로 복합장르(Hybrid genre) 문서입니다. 한 종류의 렌즈로만 해석하다 보면 상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복합장르는 멀티렌즈를 사용해야 제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복합 장르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서신

요한계시록이 복합장르이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계시록이 서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수청을 들라는 변학도의 핍박과 유혹에 굴복하지 않아 옥에 갇힌 춘향이에게 한양에서 은밀히 밀서가 도착합니다.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했고 조만간 남원 고을로 찾아와 약혼자 춘향이와 학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하겠다는 내용의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중간에 노출될 것에 대비해 다른 사람이 이해 못 하게 둘만이 아는 경험과 비유로 쓰였습니다. 마침내 이 편지를 받아본 춘향이는 핍박과 시달림을 견뎌낼 힘을 얻습니다.

요한계시록은 1~3장의 서론과 22장 후반부의 결론에서 특정 목적을 담은 편지임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편지에는 쓴 사람과 받는 사람 간에 공통의 관심사가 있고, 편지를 쓰는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요한은 로마제국의 사회적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미혹’과 ‘유혹’과 ‘박해’의 위기에 처한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신학적 윤리적으로 어떤 길을 택할지 신앙적 지침을 전달합니다. 일곱 교회는 일차적으로는 요한이 목회하던 소아시아의 교회이지만 동시에 일곱이라는 숫자는 보편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유사한 압력에 처할 후대의 모든 교회를 향한 권면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돌려 읽는 공동회람 서신이었습니다. 일곱 교회는 이 편지를 예배 시간에 함께 읽고 들었습니다. 1장 3절의 읽는 자는 단수이고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은 복수인 것으로 볼 때 요한계시록을 회중 앞에서 낭독했으리라 추정됩니다. 이 서신에는 구약의 배경지식이 있어야 이해되는 묵시적 상징과 비유가 많습니다. 회중에게는 의미가 강하게 전달하면서 외부인에게는 숨은 뜻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편지의 주제는 분명합니다. ‘주께서 이기셨으니 교회는 성도의 본분을 감당하고 이겨내라. 주의 말씀을 지키고 주께 끝까지 충성하라’라는 격려와 권면입니다.

 

묵시

학자들이 제2 성전기라 부르는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 묵시문학이 발전합니다. 묵시문학은 바벨론 포로기를 겪고 난 뒤에도 외세 침략에 시달리는 유대 민족에게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의 소망을 알려 주고 견딜 힘을 줍니다. 마치 조선 후기 부패한 정치 권력의 압제로 백성들이 절망 가운데 신음할 때 정감록이라는 묵시적 예언서가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과 유사합니다.

콜린스의 표준적인 정의는 묵시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묵시란 서사적 틀을 갖는 계시문학의 한 장르로, 그 계시가 천상적 존재로부터 인간 수신자에게 전달되는데 이를 통해 초월적 실제가 드러난다. 그 초월적 실재는 종말적 구원을 예견한다는 면에서 시간적이며, 초자연적 세계를 포함한다는 면에서 공간적 성격을 가진다.

 

묵시란 종말론적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는 상황에서 시간적으로는 현재가 아닌 종말, 공간적으로는 이곳이 아닌 천상의 실재를 우리에게 이야기의 형식으로 전달자를 통해 알려 준다는 의미입니다.

1986년 세계성서학회는 기독교 묵시 사상에 관한 세미나를 열고 기존의 정의를 발전시켜 “묵시는 초자연적 세계와 미래에 비춰 현재와 지상의 상황을 해석하고, 신적 권위로 청중의 이해와 행위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있다.” 라고 정의합니다.

묵시는 모든 낙관적 전망이 무너진 시점,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에서 출발합니다. 사면을 둘러봐도 모든 도움이 막히고 공간적으로는 하늘을, 시간적으로는 미래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힘은 초월적인 눈을 갖는 길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과 네거티브 필름의 명암이 뒤바뀐 것처럼 묵시는 현실을 정반대로 해석합니다. 실제 세계는 환상에 불과하며, 묵시의 환상이 실재라고 이야기합니다. 힘 있고 안전하다고 세상이 지시하는 길이 사실은 멸망의 길이고, 세상이 조롱하는 험난한 길이 영원한 회복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묵시는 누가 진정 이 땅의 주인이며 통치자인가를 묻습니다. 세상의 주인은 황제나 권력자가 아니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세상과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기에 묵시는 지극히 신학적이며 정치적인 문서로 세상과 반대되는 전복적 가치관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묵시는 세상의 종말이 어떤 모습일지를 알려 주지만, 종말이 아닌 오늘을 어떻게 살지에 관심을 둡니다. 묵시의 주된 기능은 격려와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주적 회복의 날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고 믿음으로 이 힘든 날을 인내하도록 합니다.

 

묵시의 신학적 특징

고먼은 묵시신학의 특징을 이원론이라고 규정합니다. 우주 안에 서로 대립하는 두 세력이 활동한다는 우주 이원론, 역사는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식 간의 투쟁이라는 역사 이원론, 모든 사람은 선악 간에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윤리 이원론, 시간은 악과 불의의 현세와 선과 정의와 평화의 내세로 나뉜다는 시간 이원론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묵시문학에는 지혜 전승적 요소인 양자 선택이라는 주제가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언 1~9장에서 두 여인의 이미지로 의인화되어 있듯이 두 길(Two-way)이라는 주제는 계시록에서도 흰옷을 입은 단정한 여인과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음녀, 새 예루살렘과 바벨론의 두 도시 등으로 이어집니다.

둘 사이의 선택이라는 주제는 신명기 30장 15~30절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제시하는 순종과 불순종, 사망과 생명, 축복과 저주의 두 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신명기적 관점인 선과 악, 지혜로운 여인과 음녀 등의 이진법적 선택 구조를 알려 주는 이유는 두 길의 끝이 어디를 향하는지 ‘환상과 상징’으로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이 현명하고 윤리적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묵시는 기존의 문서와는 다른 문법과 언어를 가집니다. 정보와 사상을 전달하는 서술적인 글과 달리 묵시는 경험을 나누려는 그림 언어입니다. 바울이 펜을 들고 차분히 글을 써 내려간다면 요한은 두툼한 붓에 물감을 잔뜩 묻혀 크고 웅장한 그림을 그립니다. 묵시는 논리적인 산문이나 논술이 아니라 상징적인 시입니다. 따라서 세부적 문자적 해석보다는 포괄적 비문자적 해석이 적절합니다.

묵시에서 색상은 이미지이고 숫자는 상징적인 형용사입니다. 예를 들어 흰색은 승리와 순결을, 붉은색은 피와 폭력을, 자주색은 음란과 악을, 검은색과 청황색은 죽음을, 황금색은 아름다움과 지속성을 상징합니다. 반면, 숫자 1/2과 1/3은 제한성을, 4는 보편성을, 6은 완전한 하나님을 모방하는 불완전성을, 7은 완전하고 충만함을, 12와 24는 열두 지파를 뜻하는 신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을, 1000은 크고 많음을 의미하는 형용사입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문자적인 숫자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이러한 묵시의 기본적인 문법을 모르고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때 커다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예언

우리가 예언이라고 할 때 장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만 한정해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면이 있지만, 예언의 주 관심사는 미래보다는 현재에 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려 주는 이유도, 과거에 일어난 일을 상기시켜 재해석해 주는 이유도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언은 사람에게 권면과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덕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서를 단순화해서 보면 “기억하라” 그리고 “기대하라 ”입니다. 야웨께서 옛적에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기억하고, 무너진 이스라엘 공동체를 어떻게 회복시키실지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한편으로는 구약의 메시지를 반복 요약(Recapitulation)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기억”하게 합니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궁극적 장래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어떻게 회복시킬지를 “기대”하게 하면서 오늘의 삶의 태도를 바로 잡도록 해 줍니다. 계시록은 여타 선지서처럼 보이는 세상과 충돌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를 알려 주면서 우리가 처한 삶의 상황,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교회를 하나님이 계시하신 현실에 대한 역 정의(counter-definitions)를 위한 타당성 구조(plausiblility structure)를 보호하는 기능을 해야 하는 집단으로 본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교회의 예배는 신자들에게 그들과 모든 사회를 견고하게 묶어주는 진정한 우주적 질서를 상기시킨다.

 

이 말을 풀어쓰면 이렇습니다. 타당성 구조(plausiblility structure)란 특정한 사회 안에서 더 타당하게 간주되는 신념이나 실천이 사회 구조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금수저 논란, 부동산 불패 신화 등이 현재 우리 사회의 견고한 타당성 구조를 유지하고 있고 세상은 이러한 가치체계를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현실(reality)을 역(逆)으로 정의하고 재해석해 줌으로써 이런 사회적 통념에서 비롯된 타당성 구조가 아닌 회복적 정의에 입각한 타당성 구조를 제시하고 그 가치체계와 신념을 따르는 삶의 방식을 지켜나가도록 지지해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해 교회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의 목적은 지역 무역 조합과 황제 숭배에 동참하며 타협하라고 유혹하는 제안을 물리치고 신앙적 가치체계를 견고하게 붙잡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물타기를 하며 공동체가 지켜내려는 '역 정의'의 의미를 훼손시킵니다. 계시록에 묘사된 무서운 비유적 환상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의 영적 심각성을 묘사하여 교인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을 읽는 우리는 이제 이런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우리를 옥죄는 현실에 대해 뭐라고 재해석하고 역 정의하는가? 각성하라고 외치는 소수의 부르짖음조차 오히려 물타기를 하며 현실은 전혀 심각하지 않고 안전하다면서 진정시키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예배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진정한 실재(reality)인, 우주적 질서를 기억나게 해 주는가?’

‘우리가 역 정의된 계시에 따라 지켜내야 하는 타당성 구조는 무엇인가? 그러한 신념에 근거한 삶의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