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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신학

합당함의 신학

by kainos 2026. 2. 9.

 

 

합당함의 신학

「히카노스에서 악시오스로: 에베소서 4 1그러므로가 가르는 은혜와 삶의 경계」

들어가는 말

헬라어 κανός(히카노스)ξιος(시오스)는 신약 성경에서 모두합당하다”, “자격 있다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같은 의미 영역에 속하지 않으며, 신학적으로도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개념들입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구분할 때, 신약이 말하는 은혜와 윤리의 구조, 곧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삶의 응답이 보다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히카노스는충분함가능성을 나타내는 언어입니다. 이 단어는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나, 주어진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적합성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점은 히카노스가 인간의 도덕적 자격이나 공로를 묻는 말이 아니라,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가능성의 질문을 던진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히카노스는 외적 행위보다는 내적 역량,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능력의 차원에서 사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2 16절에서 이 개념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는 복음 사역의 무게를 말하며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일을 누가 감당(히카노스)하리요?”

이 질문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사도의 자기 인식이 담긴 신학적 고백입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3 5절에서 그 답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자(κανοί)가 아니니, 오직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 로부터 난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히카노스는 인간 안에서 발견되는 자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세우시고 가능하게 하시는 은혜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이 두 본문을 함께 읽을 때 분명해지는 점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사역의 무게 앞에서 스스로 히카노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히카노스는 인간의 자격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고백입니다. 사람은 본래 히카노스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히카노스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신약이 말하는 은혜의 출발점입니다.

반면 악시오스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는 단어입니다. 악시오스의 기본 의미는가치에 상응하다’, ‘무게가 맞다’,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배경에는 저울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과 비교했을 때, 그 무게가 균형을 이루는지를 묻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악시오스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태도가 주어진 정체성과 어울리는가를 묻는 합당성의 언어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 1절에서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ξίως) 행하라고 권면하고, 빌립보서 1 27절에서는복음에 합당하게(ξίως) 생활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악시오스가 부르심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질문은너희가 이 부르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가 아니라, “이미 받은 부르심의 무게에 너희의 삶이 걸맞은가입니다.

이 악시오스의 의미는 요한계시록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요한계시록 3 4절에서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 가운데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을 언급하시며,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들(ξιοι)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합당함은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가 아니라, 이미 주님께 속한 자들의 삶의 태도가 그 부르심과 어울린다는 평가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5 4절에서 요한은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어디에서도 두루마리를 펴거나 볼 합당한 자(ξιος)를 찾지 못해 크게 울었다고 증언합니다. 이 장면은 인간이나 피조물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감당할 존재가 없음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서, 오직 죽임당하신 어린양만이 그 두루마리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악시오스는 도덕적 우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행위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완전히 상응하는 유일한 분을 가리키는 언어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히카노스와 악시오스는 서로 대체 가능한 개념이 아니며, 신학적으로도 분명한 순서를 이룹니다. 히카노스는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세우시는 존재론적 은혜의 언어이며, 악시오스는 그 은혜를 받은 존재가 삶으로 응답해야 할 윤리적 방향의 언어입니다. 신약의 윤리는 히카노스를 전제하지 않은 악시오스를 요구하지 않으며, 동시에 히카노스를 윤리와 분리된 상태로 방치하지도 않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히카노스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악시오스한 방향으로 요청받습니다. 은혜는 먼저 가능하게 하시고, 윤리는 그 은혜의 무게에 걸맞게 살아가도록 이끕니다. 앞서 살핀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히카노스는 은혜의 출발점이시며, 악시오스는 그 은혜가 삶 속에서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와의 관계

이 순서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지점이 바로 에베소서 4 1절의그러므로입니다. 에베소서의 구조는 흔히 생각하듯 단순한교리 다음에 윤리의 배열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서신의 전반부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무엇을 하셨는지를 충분히 서술하신 후, 그 은혜가 어떤 삶의 방향을 만들어 내는지를 후반부에서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에베소서는 은혜의 선재성과 삶의 응답성이라는 구조 위에 세워진 서신입니다. 이 전환을 설명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이 바로 히카노스와 악시오스입니다.

에베소서 1–3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본래 아무것도할 수 없는 자였으나,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에베소서 본문에 히카노스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3 20절에 사용된 신학적 동의어인 능히 하실(dynameno)’이라는 단어가 히카노스의 역할을 대신하며 1–3장의 전체 논리는 고린도후서 3 5절의 신학과 정확히 겹칩니다. 이 모든 단락에서 바울은 인간의 자격이나 능력, 공로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히카노스하게 만드셨다는 사실만을 반복합니다.

이 흐름 속에서 등장하는 에베소서 4 1절의그러므로, 은혜에서 윤리로의 도약이 아니라 방향 전환입니다. 바울은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히카노스에서 악시오스로의 이동은 단절이 아니라 필연적 전개입니다. 이는이제 너희도 무엇인가를 해내라는 요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가 이제 삶의 방향을 요청하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제 에베소서 4–6장은 악시오스라는 개념 아래 읽히게 됩니다. 악시오스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은이 사람이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이 삶이 이미 받은 부르심의 무게와 맞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한쪽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이 놓이고, 다른 한쪽에는 우리의 실제 삶이 놓이게 됩니다. 삶이 은혜를 만들어 내는가 라는 질문에는 분명히 아니라고 답해야 하며, 삶이 은혜에 응답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4-6장은 부부, 부모, 상전과 종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일상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에베소서 4–6장은 전부 정체성의 실천적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장은 공동체 안에서의 태도를, 5장은 일상의 방향을, 6장은 관계와 싸움의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이 모든 권면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형식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살아가게 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히카노스와 악시오스의 심층 구조는 분명해집니다. 에베소서 1–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히카노스하게 하시는 은혜의 선재가 강조되며, 에베소서 4 1절의그러므로를 거쳐, 4–6장에서는 우리가 악시오스하게 행하는 윤리적 응답과 삶의 방향이 제시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히카노스는 존재론적 은혜이고, 악시오스는 윤리적 방향입니다. 이 순서를 지킬 때, 은혜와 삶은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신학적 흐름으로 이해됩니다.

 

결론: 은혜의 무게를 묻는 질문, 그리고 월요일의 삶

에베소서가 독자에게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은, 신앙의 성취도를 점검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문의 방향 자체를 바꾸도록 이끕니다. 신앙의 중심 질문은 더 이상나는 합당한 사람인가가 아니며, “나는 자격을 갖추었는가도 아닙니다. 에베소서가 요청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야 합니다. 나는 이미 받은 부르심에 걸맞게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의 전환은 신앙의 성숙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더 잘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더 일치된 삶입니다. 은혜를 입증하려는 삶이 아니라, 은혜와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는 삶이 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에베소서의 윤리는 은혜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다시 말해 그 은혜가 삶 전체를 재구성할 만큼 실재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히카노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신 방식이시고, 악시오스는 우리가 그 은혜 안에서 걸어가도록 주어진 방향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의 왜곡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우리는 종종악시오스하게 살아야 히카노스해진다거나, “합당하게 살면 은혜가 유지된다거나, “삶이 은혜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은혜와 윤리의 순서를 뒤바꾸는 데서 비롯됩니다. 에베소서의 논리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히카노스하게 되었기 때문에 악시오스하게 살아가는 것이 에베소서의 복음적 구조입니다. 은혜는 삶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낳는 근원입니다.

이러한 히카노스와 악시오스의 역동적인 관계는 주일의 예배당 안에서만 머물지 않으시고, 월요일의 일터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를 띱니다. 일터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직업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직업은 하나님의 충분한 은혜가 세상의 가치와 만나는 자리이며, 그 은혜가 삶의 무게로 번역되는 현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터는 하나님의 은혜가 삶으로 드려지는악시오스의 제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무력감을 경험합니다. 성과와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히카노스하지 않다고 느끼며 좌절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1–3장이 선포하는 복음은 우리의 일터가 나의 자원이나 역량에 기초해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의 히카노스, 곧 충분한 공급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소명자는 자신의 전문성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능히 하실 능력을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일터에서의 창의성과 인내, 지혜는 내 안에서 쥐어짜내는 결과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복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것을 길어 올리는 행위입니다.

동시에 에베소서 4 1절의합당하게 행하라는 권면은 일터에서 악시오스한 직업 윤리로 구체화됩니다. 성도는 연봉이나 직급, 성과라는 세상의 저울추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의 삶의 저울 반대편에는 이미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대한 은혜의 무게추가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노동은 그 부르심의 가치에 걸맞게 정직하고 성실하며, 나아가 탁월해야 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보다 더 높은 도덕성과 전문성을 지향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품격에 합당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전신갑주가 강조되는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터는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의 원리가 작동하는 현실의 한복판입니다. 종과 상전, 오늘날로 말하면 직원과 경영자의 관계를 다루는 에베소서 6 5–9절의 권면은 결국 악시오스한 관계의 회복을 목표로 합니다.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고 주께 하듯 일하라는 말씀은, 일터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수평을 맞추려는 거룩한 시도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의 히카노스를 공급받아 일상의 악시오스를 살아내는 여정입니다.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당신은 이미 하늘의 모든 자원을 소유한 충분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의 일터에서 그 부르심의 무게만큼 세상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땀 흘리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십시오.”

구원이라는 직설법 안에 머물러 있던 성도가, 일터라는 명령법의 현장에서 은혜의 무게를 삶으로 살아낼 때, 세상은 비로소 저울 위에 놓인 복음의 참된 가치를 보게 될 것입니다.

히카노스는 은혜의 기원이고, 악시오스는 그 은혜가 삶이 되는 방식입니다.